누구든 축복받아 마땅한 날인 성탄절의 아침, 정이는 혀냐가 일어나기 전(정이가 몰랐을 뿐, 혀냐는 깨어있었을 거 같다.)에 침대서 빠져나와 눈 쌓인 제 집 정원을 걸었을 거다. 잠옷에 털실로 짜여진 겉옷 하나만 걸칠 옷차림이었으나 추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을 테다. 웬만큼 집과 멀어졌을 때 정이는 어느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느라 바빴을 것이다. 호되게 매를 맞은 아이처럼 이윽고 주저앉아 울었을 거다. 몇십 분을 그러고 있다, 어느 사이에 다가온 혀냐가 저를 위해 뒤에서 담요를 둘러준다면 뿌리칠 테지. 냉큼 일어나 혀냐의 볼을 차갑게 감싸, 뜨겁게 입맞춤을 퍼부을 거다. 혀냐는 이 열렬한 사랑에 응답해줄까?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이 두 사람이 전야였던 어제 이별하기로 한 사이라 믿지 못할 테다.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이제 각자의 행복을 빌어주자고 한 바로 몇 시간 전의 정이와 지금의 정이는 딴판이다. 바로 이런 점을 본능적으로 경계해 꺼렸을 테지.
2 놀이공원
둘이 놀이공원에 간다면 기구는 몇 개 타지 않을 거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도쿄 디즈니랜드의 어트랙션을 보니 생각이 바뀐다. 신데렐라의 페어리테일 홀, 피터팬의 하늘여행을 어떻게 참겠어. 뎡이는 퍼레이드 뿐만 아니라 캐릭터 그리팅까지 기다릴 것이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어른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런 뎡이에게 혀냐는 맞춰주겠지.
3 요리
대다수의 남자가 선호하는 메뉴가 돈가스와 제육볶음이라는데, 뎡이는 대다수의 남자에 속할 거다. 근데 역시 맑게 끓여낸 소고기뭇국, 슴슴히 무친 시금치 외 나물 몇 가지, 갓 만든 겉절이 등을 두고 먹는 걸 제일 좋아할 테지. 혀냐는 그 대다수의 남자 취향이 아니고, 한식보다는 양식이 취향. 그런데 기름진 음식보다는 담백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니 결국에는 정이와 좋아하는 음식의 결이 같다. 포카치아에 올리브, 샐러드, 수란 같은 걸 먹다가 뎡이와 살기 시작하면 이와 자기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킬 요리를 하겠지.
4 음악
아까 혀냐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잠깐 얘기했는데 역시 클래식이고, 바흐를 좋아하는 건 예술을 수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 일정하고 계산되어있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라벨의 볼레로도 좋아할 것 같다. 피아노의 경우 잘 배우고 빠르게 이해해서 난도 있는 곡이나 테크닉 필요한 류의 연주는 잘 하겠지만 감정을 섞으라는 조언을 들으면 웃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이겠지? 그러나 먼 훗날, 뎡이가 좋아하는 곡을 뎡이를 위해서 정말로 잘 연주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날이 오겠지. 마침 뎡이가 좋아하는 곡은 슈만 트로이메라이, 드뷔시 달빛, 사티 짐노페디 1번 같은 서정적인 곡이다. 혀냐가 사랑을 실어 연주해 주었으면. 뎡이는 어릴 적 배우다 말아 간단한 곡만 연주할 줄 아는 수준이라, 물려받은 이유로 집에 있는 피아노는 사실 장식이었을 거다. 혀냐가 주인이 되겠네. 혀냐가 그런 서정적인 곡을 연주할 땐 아예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그걸 따라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겠으나 정이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면서 조금씩 자기 안의 무언가가 변해간다고 느끼겠지.
5 작업실에서
뎡이는 혀냐의 작업실에 웬만해선 들어가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혀냐가 건강을 해칠 정도로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 싶으면, 바느질 하는 혀냐의 뒤에 서서 긴 머리를 느릿느릿 땋아주며 잠시만 쉬자고 꼬신다. 슬슬 드러나는 흰 목덜미를 보며 응큼한 상상을 하는 건 덤이다. 반면 혀냐는 뎡이가 머리를 땋아주면서 목덜미를 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 형이 오기 직전에 옷깃을 헐겁게 흐트려 놓거나 옷을 한쪽으로 당겨서 목덜미가 더 드러나도록 셋팅해둘 것이다. 하여튼 형 참 귀엽다니까.
6 동물을 기른다면
둘이 개를 기른다는 상상을 하면 늘 견종은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외에도 보더콜리, 저먼 셰퍼드가 어울리는 것 같음. (페키니즈, 치와와 같은 소형견은 어울리는지 모르겠음. 근데 말티즈라면 어울릴 것도 같네. 하지만 정이와 혀냐에겐 온갖 애교를 다 부리는데 저 둘 외에겐 바로 개지랄을 떨 거 같음. 그리고 자기가 사람인줄 알 거 같음.) 왠지 새끼는 어울리지 않고 어째서인지 다 큰 개가 어울림. 유기견 보호소에 태어난지 이제 몇 달 지난 강아지가 있다 해서 녀석을 데려오려 갔다가, 막상 안락사 당할 예정인 인기 없는 개(5살 이상으로 추정되는데다 덩치가 크고 활기가 없는 등의 이유로...)를 데려왔을 거 같음. 정이와 혀냐의 적당한 거리감에 마음이 놓인 개가 오히려 먼저 다가오지 않을까? 정이는 대체로 개가 원하는대로 해주는 유형의 보호자라서, 배변훈련 같은 기본적인 훈련 외의 생활 습관 훈련은 사실 혀냐의 몫일지도 모르겠음... 예를 들어 개가 침대 위에 올라와 정이, 혀냐와 함께 자려고 낑낑댄다면, 정이 같음 침대로 바로 올려 같이 눕겠지만 혀냐 같음 평소대로 켄넬로 돌아가게끔 하는. 혀냐가 자신을 위해 개 키우는 걸 허락(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거 같다만)했기에 정이는 혀냐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때때로 미안해할 거 같음. 그리고 의외로 혀냐가 개를 참 잘 길러 놀랄 거 같네. 산책 같은 거야 그렇다 쳐도 쓰다듬기조차 의무로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혀냐 답다면 답다고 생각할 거 같음. 그러거나 말거나 개는 정이도 혀냐도 매우 잘 따를 거 같음. 산책은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만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로) 늘 둘이 함께 나가면 좋겠음. 싸운 날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같이 나갔다 오면 좋겠음. 하지만 싸웠다고 말을 안 하고 몇 시간을 같이 걷다 올 거 같진 않기도 함. 근데 고양이도 둘과 어울리지 않나? 혀냐는 (애초에 동물을 기르고 싶어할 캐릭터가 아니다만) 개와 고양이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아무래도 고양이일 거 같은데, 정이는 개와 고양이 다 좋아할 거 같다만, '아무래도 고양이는 한 마리로 족하다.' 생각하며 혀냐를 말없이 쳐다봤을 거 같음. 개는 기른다면 두 마리는 한 번에 못 기를 거 같음. 하지만 고양이는 기른다면 한 번에 세 마리는 기를 수 있을 거 같음. 어미가 돌아오지 못해 죽기 직전의 세 마리의 새끼를 길바닥에서 주워와 기르는 거지. 아니면 창고로 이용하는 지하실에 숨어든 놈들이었음 좋겠음. 정이가 글 쓰려고 앉으면 고양이 세 마리가 앵알앵알대며 책상 위에 자리 잡는 거 귀여워. 하지만 혀냐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 고양이가 세 마리면 아무래도 무리겠지? 둘이서 옷 하나 붙잡고 돌돌이 돌리는 모양새가 하찮음.
7 유학
혀냐가 영국으로 '같이 가자' 했을까? 그랬더라면 정이는 답을 바로 주지 못했을 거임. 혀냐가 영국으로 '같이 가야 한다' 했을까? 그랬더라면 정이는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했을 거 같음. 자신의 커리어와 기반, 연로하신 친조부모 및 외조부모 등 정이가 한국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대려면야 댈 수 있었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굳이 한국에 남아야만 하는 이유는 또 없었음. 자신의 커리어는 (상대적으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직업이기에) 타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해보였고, 친조부모 및 외조부모에게 예전과 같은 애틋함은 옅어졌고 등. 정이는 이성적이자 이상적인 선택을 위해 저울질을 열심히 했겠지. 하지만 가장 무거운 게 혀냐였을테지. 자신이 한국에 남았을 때 혀냐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물론. 혀냐를 알기 전과 같이 살면 됨. 이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깅을 하고 들어와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며 노트북을 켜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을 거 같음. 회사(매니지먼트)와 얘기도 나누고(회사 시점에서는 정이의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을 거 같음), 집은 동생 중 하나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비자를 발급 받고 등 할 일이 매우 많았으나 어떻게든 해냈을 거임. 영국으로 갔음 좋겠음.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
8 뎡이의 취미에 대하여
뎡이의 취미는 모두 조부모로부터 온 것이다. 조부모를 따라 독서, 서예, 바둑, 골프를 시작하였다가, 그대로 뎡이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독서의 경우 달에 20권 이상 읽는 편이다. 활자에 중독된 수준이라 보는 게 적당할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직업을 택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볼 수 있다. 바둑의 경우 뎡이의 바둑 놓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대강 아마 5단 정도가 아닐까 싶다. 바둑을 배우러 기원을 다니기도 했었다. 시작은 당연히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도 못지않은 실력자여서, 대국 시 승률은 뎡이가 6할에 할아버지가 4할 정도다. 골프의 경우도 실력이 출중하다. 홀인원을 한 적도 있어서, 가족들이 기념패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혀냐는 이런 뎡이의 취미를 두고서, 윗세대의 취미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